사무실 이름을 말할 때마다 한 번에 알아듣는 이가 많지 않다. 잘못 표기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디딤, 다림, 드림이 가장 흔한 오기의 예다.
그러다 보니 쉽게 잊히지도 않는 것 같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무실 상호인 D.LIM은 Design과 나의 성姓인 LIM의 합성어이며 ‘Design & Life In Mind’라는 뜻을 가진 두문자어(Acronym)다. 건축을 디자인으로 국한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마케팅의 일환이자 건축 업역의 수평 확장을 위한 나름대로의 초석이다.

모든 이들에게는 그들만이 꿈꿔왔던 각자 다른 삶이 있다. 그들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음속 그림을 끄집어내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할 일이요. 그 모양새를 이해하고, 그것을 주변과 맞추어보고, 이웃하는 그림과 나란히 세워도 보고, 그 안에 다시 일상을 그려도 보며, 그 이면의 모습까지 다듬은 것이 두 번째요. 그 삶의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작업의 마지막이다. 대지와 프로그램을 분석하고 설계에 투자하는 시간만큼 그곳을 사용할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많은 노력을 쏟는 이유가 그러하다. 이런 작업들이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집을, 이웃과 함께하는 긍정적인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내는, 평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축가의 역할이 아닐까?

“The difference between a good and a poor architect is that the poor architect succumbs to every temptation and the good one resists it.” by Ludwig Wittgenstein


매번 초기 설계안을 구상하면서, 우리는 많은 유혹들에 부딪친다. 우리의 건축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여러 수단들,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선정적인 디자인 어휘들, 그들의 유혹에 쉽게 굴복한다면, 우리는 한낱 피상적인 스타일리스트로 전락할 것이며, 마음속의 삶을 조각하는 좋은 건축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건축일 뿐 대중과 함께하는 진정한 건축이 아니다. 디림이 ‘지속가능한’ 아마추어이고 싶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한 진리이면서도 지키기는 어려운 것은 건축이나 삶이나 다를 바는 없는 것 같다.
화려한, 장식적인, 극적인, 원색적인, 강렬한, 복잡한, 위압적인.
유혹적인 말이며 인위적이다.

세련된, 멋스러운, 인상적인, 눈에 띄는, 두드러진, 풍부한, 위엄있는.
매력적인 말이며 자연스럽다.

유혹적인 말의 내면에는 건축의 폭력적인 본성이 숨어있고, 자연의 언어에는 온건함의 미학이 스며있다. 두 집합의 단어를 적절하게 조합하면 디림건축이 추구하고 있는 건축의 본질이 보이기 시작한다.

화려하지 않지만 세련된, 장식적이지 않지만 멋스러운, 극적이지 않지만 인상적인, 원색적이지 않지만 눈에 띄는. 강렬하지 않지만 두드러진, 복잡하지 않지만 풍부한, 위압적이지 않지만 위엄있는...
오목함과 볼록함의 중첩 : Infraposition 볼록함보다는 오목함을 좋아한다. 우뚝 선 조형보다는 움푹 파인 흔적이 좋다. 평지위에 도드라진 건축보다는 땅에 묻혀 조화된 건축이 항상 매력적이다. 오목함은 대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자연스러우며 가끔은 자연이 되기도 한다. 볼록함은 땅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것을 압도 하곤 한다. 그리고 땅과 종종 유리되기도 한다. 마치 물위에 떠있는 새빛둥둥섬처럼 말이다.

그동안 계획안으로 끝이 난 많은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유독 웅진백제역사문화관은 그 아쉬움이 크다. 역사문화관은 무령왕릉을 포함한 일곱기의 고분이 안장된 충청북도 공주 송산 중턱에 들어설 예정이었다.수려한 산세를 가진 송산에 자리 잡고 있지만 대지는 산의 형상을 거스르고 이미 인공적으로 평탄해진 상태였다. 송산 고분군 앞 인공의 평지위에 우뚝 솟을 역사문화관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 속에서도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일곱기 고분의 볼록한 형상을 오목함으로 대치시키면서 내 머릿속 상상력이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일곱의 고분을 위한 일곱의 공혈(孔穴)은 송산의 지형과 동화되는 건축의 겸손한 대응방식이었다.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어도 관람객들은 찬란했지만 쇄락한 백제의 역사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건축과 땅의 관계는 한쪽이 우세해서는 안 되며 서로 양보하는 겸손한 자세로 만나야 비로소 시작된다고 믿는다. 건축과 자연과의 만남 역시 같다. 건축물이 들어서기 이전과 이후의 관계는 산술적 합의 결과인 중첩이 아니라 건축과 자연의 유기적인 결합의 관계여야 한다. 위로 포개지는 것(superpose)이 아니라 아래로 포개지는 것(infrapose).
지형과 건축의 협업 평지 혹은 경사지. 프로젝트의 시작에서 항상 둘 중 하나를 만나게 된다. 자신의 창작물을 도드라지게 만들어주는 평지는 새하얀 도화지와 같이 무엇이라도 받아줄 것 같지만 나는 경사지를 더 좋아한다. 설계가 의뢰되고 현장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에 오랫동안 그 형태로 있어온 듯 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대지가 본연의 형상을 가지고 있을 때 내 머릿속에는 많은 상상들이 시작된다. 여기서 자연스럽다는 말은 지형의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관계의 자연스러움을 의미한다.
반듯하게 나누어진 필지보다는 이웃과의 관계와 주변맥락의 변화를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대지의 형태나 땅의 원형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만 변형된 지형을 말한다. 시흥3동 어린이집이 그러했고, 네이버 어린이집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500M2 남짓의 시흥동의 대지는 6미터 도로에 접한 작은 주택과 바로 뒤 맹지위에 지어진 조금 더 큰 주택을 합필해 만들어졌다. 차가 오르기도 쉽지 않는 경사진 도로에서 진입할 수 있는 틈을 겨우 허락한 대지는 이웃한 주변 대지보다 낮아 대부분 옹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대지보다 4M 높은 도로에서 진입하다보니 오히려 유치원은 나지막한 단층집이 되었다. 주택가 좁은 골목길의 스케일에 딱 걸맞은 외관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0세부터 3세까지 영유아반들이 출입구에 인접해 2층에 배치되고 활동적인 4, 5세 유아반들은 계단을 내려가 1층에 들어섰다.

1층은 넓은 놀이터를 둘러싸고 배치되어 있어 활동량이 많은 아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놀이 환경을 제공한다. 1층 출입구에 영유아반이 배치되고 계단을 올라가 2층에 4, 5세 유아반을 두는 일반적인 어린이집 구성방식에서는 4, 5세 유아반의 외부 공간 접근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시흥3동 어린이집은 대지가 낮아 도로에서 바로 2층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정반대의 구성이 가능해 졌고, 복잡한 외부환경을 등지고 내부로 수렴되는 건축공간을 조직할 수 있었다. 대지가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단점이 오히려 어린이집에는 장점으로 활용된 것이다.

네이버어린이집의 대지 내 경사는 시흥동대지보다 더욱 급격하다. 전면 6미터 도로에서 시작된 경사는 대지 안쪽으로 깊게 들어가며 뒷산으로 연결된다. 자연녹지지역이기 때문에 넓은 대지 위에 겨우 20%밖에 사용할 수 없었지만, 경사지였기 때문에 더 이상 제약이 아니었다. 땅위로는 3개동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땅속으로는 넓은 기단이 형성되어 서로 연결된다. 경사를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된 어린이집에서 300명의 어린이들이 바로 뛰어나와 놀 수 있는 놀이터가 매 층마다 만들어졌다. 경사지위에 위태로운 놀이터가 아니라 흙과 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안전한 놀이공간이 조성됐고, 최상층을 제외한 모든 층이 피난 층이 되는 구조가 되었다. 세 개의 단으로 구분된 대지와 세 개의 동으로 나뉜 건축이 만나면서 사이사이 아홉의 외부공간이 만들어졌고 크기와 모양이 서로 달라 아이들에게 다양한 놀이 체험의 기회를 준다.
평지 위 오목한 건축 새로남중등센터는 대전의 신도심인 둔산지구 안에 들어설 예정이었다. 앞으로는 정부종합청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옆으로는 예술의전당의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계획지구인 만큼 반듯반듯한 정형의 필지로 구획되었고 대지는 완벽한 평지였다. 걱정이 앞섰다. 무엇을 단초로 계획을 시작할 것인가? 나의 상상력은 무한의 가짓수로 분산되면서 계획에 대한 확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졌다. 이때 건물 내부에 오목한 홈을 파면서 무한대로 늘어났던 경우의 수가 수렴하기 시작했다. 도심지 고층형 학교가 가질 수 없는 대운동장 대신에 건물의 내부를 덜어내면서 얻어진 틈과 구멍에 학생들을 위한 숨통을 삽입했다. 아트리움을 중심으로 둘로 나뉜 교실 층의 유닛은 기존 교육시설의 폐쇄적인 공간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제안한다. 도심의 고층형 중학교가 가진 평면적 한계는 교실-거실-아트리움-도서관-로비-정원으로 연결되는 연속적인 공간띠를 통해 수직적으로 그리고 외부로까지 확장된다. 20미터 천정고를 가진 아트리움을 중심으로 다양한 크기의 공간들이 적층되고 서로 연결되며 도시학교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냈다.

안중근의사기념관도 마찬가지였다. 남산이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대지는 공원으로 이미 반듯하게 구획된 정방형의 평지였다. 최고높이 12미터라는 제한과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라는 상징적인 의미는 평평한 땅위에 오목한 구멍을 팔 수 있는 여지를 내주었고, 비로소 나의 상상이 시작될 수 있었다. 아래로 포개지듯 12개로 분절된 덩어리가 구덩이에 안쳐지고 대지와 건축의 관계가 만들어졌다. 행락객들로 가득한 지상의 레벨에서 한 단 내려와 느티나무 숲과 하늘만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명상의 공간이 주출입구와 함께 만들어졌다.

제주도 한라산 자락에 준공된 더포럼은 주변을 둘러싼 삼나무 숲의 최상단보다 낮게 설계되었다. 건축의 본성을 최소화하면서 인공의 지붕을 자연에 내어준다. 지면에서부터 부드럽게 구부러져 올라가는 건물의 지붕은 한라산의 산세와 공명하며 대부분의 공간을 지하로 내려앉혔다. 포럼의 세 개의 층은 대지와 세 곳의 접점을 통해 연결되며 지붕까지 포함하면 건물은 네 개의 출입구를 갖는다. 평지였지만 건축 스스로 인공의 지형을 만들어내면서 대지와 건축의 관계는 비로소 유기적이 된다.

볼록한 대지위에 오목한 건축이 좋고 오목한 대지위에 오목한 건축이 좋다. 대지위에 얹힌 건축이 아니라 대지 안에 겹쳐진 건축이 좋다. 대지에 건축이 아래로 포개지는 중첩의 관계는 디림건축의 작업 간에도 적용된다. 프로젝트와 프로젝트 사이에서 서로의 시작과 끝을 공유하며 계속 진화중이다.